VIP와의 결혼식
- 등록일2024.04.19
- 조회수2512
#1화. 최대한 화려한 결혼식으로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높은 천장 위에서 반짝였다. 버진로드 양 옆은 영롱하게 빛나는 캔들 라이트가 가득하고, 탐스럽게 피어난 생화들은 꽃밭을 옮긴 듯 풍성하게 장식되었다.
크리스탈 장식들이 마치 은하수가 넘실거리듯 무수히 반짝거리며 우아하고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이 곳은 바로, 서울의 가장 유명한 호텔 웨딩홀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회를 맡게 된 송준석 입니다. 곧 예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하객 여러분들께서는…….”
젊고 말끔한 유명 아나운서의 사회를 배경으로, 고급 의복을 갖춰 입은 재계의 인사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하객들. 코 끝에 생화의 그윽한 향기가 맴돌아 산뜻한 기분을 즐겼다. 다만 한 사람은 빼고.
“장식 오케이, 조명 오케이, 생화 컬러가 살짝 아쉽지만 오케이, 어라, 크리스탈 연출이 오더랑 다른데?”
곱게 단장해 미모를 뽐내는 여자가 중얼거리며 홀 내부를 지켜보았다.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내부를 살피며 유명 사진작가들이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확인했다.
그녀는 이 웨딩의 담당 플래너 도새롬이었다. 오늘 이 결혼식은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화려하게 장식할 최상류층의 예식이다. 그때 새롬에게 직원이 다가서며 말했다.
“신부님, 이제 대기실로 이동하실게요. 지금부터는 플래너 새롬실장님은 잠시 숨겨두고 신부님으로만 활동하셔야 해요. 역시 본인 결혼에서도 참 꼼꼼하시다니까.”
그렇다, 이 결혼식을 열심히 준비한 플래너이자 신부 역을 맡은 도새롬 양은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웨딩드레스는 어깨에 우아한 시폰이 둘려 있으며 밑단에는 유니크한 꽃문양이 새겨져 있어 풍성하지만 세련된 핏을 자랑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기실로 들어간 새롬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환하게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곧 예식이 시작되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모시겠습니다. 아주 잘생긴 신랑입니다, 윤세훈 군 입장!”
눈부신 조명과 함께 신랑이 먼저 걸어 나갔다. 모델 같은 길쭉한 기럭지로 당당하게 입장하는 신랑의 얼굴은 주연배우 급의 미남형이다. 시원하게 넘긴 머리와 짙은 눈썹, 그 아래에 얇은 속쌍커풀이 진 눈, 뚜렷하고 높은 콧대와 남자답고 날카로운 턱선까지.
차가워 보이는 듯하지만 서글서글하고 단정해 보이는 인상이 매력적이었다. 새롬은 앞에 걸어 나가는 신랑을 보며 생각했다.
‘참 뉘 집 아들인지 잘생기고 쭉 뻗었네. 오늘만큼은 나도 우아한 백조처럼 보여야겠어.’
새롬은 등을 곧게 펴 모델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래야 사진이 더 멋지게 나오니까.
“그럼, 이번에는 오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님을 모시겠습니다, 신부 도새롬 양 입장!”
최고로 럭셔리한 모습을 위해 돈을 쏟아부은 티가 나는, 그야말로 초호화 결혼식이 시작되었고 새롬은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뎠다. 길기로 유명한 버진로드의 끝에 신랑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다.
사랑에 푹 빠진 듯 달콤하고 촉촉한 눈빛을 발사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여쁜 신부를 보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던 신랑은 사랑의 밀어를 작게 속삭였다.
“영혼까지 끌어모았군요.”
“어머? 전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 더 훌륭한데요.”
세훈의 농담에 새롬은 긴장된 마음이 살짝 풀렸다. 작게 웃으며 비즈니스 모드에 돌입해 이어지는 세훈의 말을 새겨들었다.
“어깨 더 피고 턱 너무 들지 마시죠. 사진 잘 나오려면. 지금, 살짝 눈 내리깔고 웃으시고. 이따 주례 중간에도 서로 눈 마주치며 웃는 거 기억하길 바랍니다.”
“기억하죠. 연기 잘하시네요? 방금 표정 좋았어요. 자기도 바로 같이 웃어주세요.”
수줍게 웃는 선남선녀의 대화는 일반적으로 사랑에 푹 빠진 신랑과 신부라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몇 달 전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
어느 화창한 날 오후의 사무실, 점심시간이 지나 직원들 모두 꾸벅꾸벅 졸음에 맞서 싸우고 있을 때였다.
띠링– 띠링-
“어우 새롬씨, 자기가 좀 나가봐. 오늘 상담 없지 않아?”
“하암- 오늘 지면광고 촬영 있는 날이잖아요.”
하품을 쩍 하며 입구로 가는 새롬의 뒤로 삐까뻔쩍한 내부가 보였다. 화이트톤의 사무실은 고급스러운 장식품이 가득하지만 정돈된 배치로 세련된 인테리어를 뽐낸다.
여기는 서울의 유명 웨딩업체 중 하나인 글로리위드유 사무실로, 생애 단 한 번의 영광을 당신과 함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고객들의 마음이 더욱 설레도록 예술적인 공간에서 상담해 설렘과 신뢰감을 동시에 주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새롬이 연 입구에는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서있었다. 수트핏이 예술인 매혹적인 남자지만 그렇다고 새롬의 동태눈깔은 바뀌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하러 오신 분이죠?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촬영? 그런 거 아니고, 오늘 상담을 좀 받고 싶습니다만.”
“네? 지면광고 촬영차 오신 거 아니세요?”
그때 뒤쪽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키는 크지만, 앞의 남자처럼 다부진 체격은 아니었다. 수트핏도 빈약하고, 얼굴은 반반하지만 좀 아쉬운데…….
“안녕하세요, 오늘 지면 스냅 촬영 모델로 왔습니다. 최설아 실장님 계시나요?”
“아, 안쪽으로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이 남자가 아니고 저 남자구나, 외모로 상당히 밀리는 비주얼을 본 새롬은 내심 아쉬워했다. 요즘 매출이 줄어 광고가 걸리면 수입 좀 늘어날까 기대했었는데 소용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 쌔끈한 모델 같은 의문의 인간은 뭘까 생각하는데 남자가 말했다.
“예약 없이 왔는데, 결혼 준비 상담 가능하겠습니까?”
“원래는 예약 필수인데, 마침 상담이 없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기계적인 미소를 짓는 새롬은 옆쪽의 작은 테이블로 안내했다. 화사한 분위기를 위해 항상 올려두는 생화 화병을 보니 꽃이 살짝 시들어 상태가 안 좋았다. 요즘 매출이 적다고 툴툴거리던 설아 실장님이 일주일만 더 두자고 했던 게 생각났다.
“신랑님, 신부님은 같이 안 오셨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은 간단한 견적 정도만 바라실까요?”
“아니요, 최대한 다 결정하려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신부 없이 혼자 어떻게 결정하겠다는 건지 의아해진 새롬은 피곤함을 느꼈다. 보통 결혼 관련된 선택은 신부의 취향에 따라 정하고, 예산에 맞춰 신랑과 조정해 나가는 부분인데 파혼하려고 하는구나 싶다.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본 새롬은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아, 얼굴 보면 풀리겠구나.
“신랑님, 오늘 다 결정하는 건 무리라서요. 예식 날짜와 홀, 보증 인원, 원하신다면 스튜디오, 드레스샵, 메이크업 샵까지 확인하셔야 해서 신부님과 다시 방문 예약 부탁드릴게요.”
“날짜는 9월 중순의 토요일, 홀은 서운 호텔 크리스탈관, 나머지는 샘플 보여주시면 빠르게 정하겠습니다.”
“……서운 호텔 이요?”
서운 호텔 그 안에서도 크리스탈관이라 함은, 국내 재벌가들과 탑 연예인들이 결혼하는 홀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홀인데, 거기에서 하겠다니 새롬의 눈빛이 달라졌다.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으니 수트, 시계, 구두에서 돈 냄새가 폴폴 난다.
“최대한 화려한 쪽으로, 추가할 수 있는 옵션은 다 추가해도 괜찮습니다. 여기 VIP 전용 웨딩플래너가 별도로 있다고 하는데, 그쪽과 상담하고 싶습니다.”
옵션까지 최대로 한다니 그냥저냥 한 부자가 아닌 것 같다. 홀 견적만 최소 1억, 플라워 옵션 최대가 7천, 칵테일 및 부대비용 추가 2천 까지.
기본으로만 잡아도 억 단위가 훌쩍 넘어가는데, 대형 계약일 것으로 평소보다 큰 수수료가 떨어질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전자두뇌로 계산을 마친 새롬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제대로 찾아오셨네요. 그게 바로 저예요 신랑님.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편안하게 퍼스널한 공간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 음료는 어떤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커피나 차, 주스 뭐든 말씀하세요!”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변한 새롬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다. 보통은 신부의 결정이 큰 결혼식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계약서 작성까지 스피드하게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이게 얼마짜리야. 이 녀석 큰 놈이다!’
***
넓고 분리된 응접실로 다시 들어왔다. 이곳은 싱싱하게 관리된 생화 다발로 장식되어 있다. 언제든 이곳만큼은 완벽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VIP 전용 상담실이다.
새롬의 얼굴은 아까 칙칙했던 얼굴빛과는 다르게 생기가 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크흠, 목소리까지 확인한 뒤 세상 친절한 목소리와 함께 명함을 내민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 상담을 맡은 VIP 전문 플래너 도새롬 팀장입니다. ”
금박으로 꾸며져 빛나는 명함을 받은 남자는 피식 웃었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고 턱을 살짝 들어 눈앞의 새롬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는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활짝 웃으며 그 시선을 받는 새롬은 능글맞게 말했다.
“제가 아까는 춘곤증에 몸이 피곤했는데, 이렇게 멋진 신랑님이 오시니 갑자기 힘이 솟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예식 날짜 먼저 확인해 볼게요.”
“네, 갑자기 다른 직원과 상담하는 것 같군요.”
“하하, 제가 반전 매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에게 예식 날짜를 확인한 새롬은 자료 책자를 무더기로 들고 와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보통은 신부님들의 취향대로 홀, 스튜디오, 드레스 컨셉을 보여드리고 추천해 드립니다.”
“…….”
“신랑님께 신부님과 상의하실 수 있도록 몇 곳 추려서 자료 전달해 드릴 테니, 같이 확인하시고 편안히 연락해 주세요. 홀은 정해졌으니, 스튜디오부터 정리하고 후보지를 드릴게요.”
“제가 좀 바빠서 오늘 스케줄까지 확정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신부님과 상의해 보시는 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 계약까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롬은 또 다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질 것 같지만 에라 모르겠다, 계약 하자고 했으니 그냥 진행해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신랑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윤세훈입니다.”
그렇게 계약은 하나씩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신부의 마음에 쏙 들길 바라며 당일에 전체 계약이 완료되었다. 그런데 역시나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했던가, 한 달 뒤 윤세훈의 연락을 받았다.
「결혼식을 미뤄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시간 괜찮겠습니까?」
문자를 확인한 새롬은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이 새끼 파혼할 줄 알았다고.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높은 천장 위에서 반짝였다. 버진로드 양 옆은 영롱하게 빛나는 캔들 라이트가 가득하고, 탐스럽게 피어난 생화들은 꽃밭을 옮긴 듯 풍성하게 장식되었다.
크리스탈 장식들이 마치 은하수가 넘실거리듯 무수히 반짝거리며 우아하고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이 곳은 바로, 서울의 가장 유명한 호텔 웨딩홀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회를 맡게 된 송준석 입니다. 곧 예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하객 여러분들께서는…….”
젊고 말끔한 유명 아나운서의 사회를 배경으로, 고급 의복을 갖춰 입은 재계의 인사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하객들. 코 끝에 생화의 그윽한 향기가 맴돌아 산뜻한 기분을 즐겼다. 다만 한 사람은 빼고.
“장식 오케이, 조명 오케이, 생화 컬러가 살짝 아쉽지만 오케이, 어라, 크리스탈 연출이 오더랑 다른데?”
곱게 단장해 미모를 뽐내는 여자가 중얼거리며 홀 내부를 지켜보았다.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내부를 살피며 유명 사진작가들이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확인했다.
그녀는 이 웨딩의 담당 플래너 도새롬이었다. 오늘 이 결혼식은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화려하게 장식할 최상류층의 예식이다. 그때 새롬에게 직원이 다가서며 말했다.
“신부님, 이제 대기실로 이동하실게요. 지금부터는 플래너 새롬실장님은 잠시 숨겨두고 신부님으로만 활동하셔야 해요. 역시 본인 결혼에서도 참 꼼꼼하시다니까.”
그렇다, 이 결혼식을 열심히 준비한 플래너이자 신부 역을 맡은 도새롬 양은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웨딩드레스는 어깨에 우아한 시폰이 둘려 있으며 밑단에는 유니크한 꽃문양이 새겨져 있어 풍성하지만 세련된 핏을 자랑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기실로 들어간 새롬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환하게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곧 예식이 시작되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모시겠습니다. 아주 잘생긴 신랑입니다, 윤세훈 군 입장!”
눈부신 조명과 함께 신랑이 먼저 걸어 나갔다. 모델 같은 길쭉한 기럭지로 당당하게 입장하는 신랑의 얼굴은 주연배우 급의 미남형이다. 시원하게 넘긴 머리와 짙은 눈썹, 그 아래에 얇은 속쌍커풀이 진 눈, 뚜렷하고 높은 콧대와 남자답고 날카로운 턱선까지.
차가워 보이는 듯하지만 서글서글하고 단정해 보이는 인상이 매력적이었다. 새롬은 앞에 걸어 나가는 신랑을 보며 생각했다.
‘참 뉘 집 아들인지 잘생기고 쭉 뻗었네. 오늘만큼은 나도 우아한 백조처럼 보여야겠어.’
새롬은 등을 곧게 펴 모델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래야 사진이 더 멋지게 나오니까.
“그럼, 이번에는 오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님을 모시겠습니다, 신부 도새롬 양 입장!”
최고로 럭셔리한 모습을 위해 돈을 쏟아부은 티가 나는, 그야말로 초호화 결혼식이 시작되었고 새롬은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뎠다. 길기로 유명한 버진로드의 끝에 신랑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다.
사랑에 푹 빠진 듯 달콤하고 촉촉한 눈빛을 발사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여쁜 신부를 보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던 신랑은 사랑의 밀어를 작게 속삭였다.
“영혼까지 끌어모았군요.”
“어머? 전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 더 훌륭한데요.”
세훈의 농담에 새롬은 긴장된 마음이 살짝 풀렸다. 작게 웃으며 비즈니스 모드에 돌입해 이어지는 세훈의 말을 새겨들었다.
“어깨 더 피고 턱 너무 들지 마시죠. 사진 잘 나오려면. 지금, 살짝 눈 내리깔고 웃으시고. 이따 주례 중간에도 서로 눈 마주치며 웃는 거 기억하길 바랍니다.”
“기억하죠. 연기 잘하시네요? 방금 표정 좋았어요. 자기도 바로 같이 웃어주세요.”
수줍게 웃는 선남선녀의 대화는 일반적으로 사랑에 푹 빠진 신랑과 신부라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몇 달 전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
어느 화창한 날 오후의 사무실, 점심시간이 지나 직원들 모두 꾸벅꾸벅 졸음에 맞서 싸우고 있을 때였다.
띠링– 띠링-
“어우 새롬씨, 자기가 좀 나가봐. 오늘 상담 없지 않아?”
“하암- 오늘 지면광고 촬영 있는 날이잖아요.”
하품을 쩍 하며 입구로 가는 새롬의 뒤로 삐까뻔쩍한 내부가 보였다. 화이트톤의 사무실은 고급스러운 장식품이 가득하지만 정돈된 배치로 세련된 인테리어를 뽐낸다.
여기는 서울의 유명 웨딩업체 중 하나인 글로리위드유 사무실로, 생애 단 한 번의 영광을 당신과 함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고객들의 마음이 더욱 설레도록 예술적인 공간에서 상담해 설렘과 신뢰감을 동시에 주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새롬이 연 입구에는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서있었다. 수트핏이 예술인 매혹적인 남자지만 그렇다고 새롬의 동태눈깔은 바뀌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하러 오신 분이죠?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촬영? 그런 거 아니고, 오늘 상담을 좀 받고 싶습니다만.”
“네? 지면광고 촬영차 오신 거 아니세요?”
그때 뒤쪽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키는 크지만, 앞의 남자처럼 다부진 체격은 아니었다. 수트핏도 빈약하고, 얼굴은 반반하지만 좀 아쉬운데…….
“안녕하세요, 오늘 지면 스냅 촬영 모델로 왔습니다. 최설아 실장님 계시나요?”
“아, 안쪽으로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이 남자가 아니고 저 남자구나, 외모로 상당히 밀리는 비주얼을 본 새롬은 내심 아쉬워했다. 요즘 매출이 줄어 광고가 걸리면 수입 좀 늘어날까 기대했었는데 소용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 쌔끈한 모델 같은 의문의 인간은 뭘까 생각하는데 남자가 말했다.
“예약 없이 왔는데, 결혼 준비 상담 가능하겠습니까?”
“원래는 예약 필수인데, 마침 상담이 없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기계적인 미소를 짓는 새롬은 옆쪽의 작은 테이블로 안내했다. 화사한 분위기를 위해 항상 올려두는 생화 화병을 보니 꽃이 살짝 시들어 상태가 안 좋았다. 요즘 매출이 적다고 툴툴거리던 설아 실장님이 일주일만 더 두자고 했던 게 생각났다.
“신랑님, 신부님은 같이 안 오셨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은 간단한 견적 정도만 바라실까요?”
“아니요, 최대한 다 결정하려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신부 없이 혼자 어떻게 결정하겠다는 건지 의아해진 새롬은 피곤함을 느꼈다. 보통 결혼 관련된 선택은 신부의 취향에 따라 정하고, 예산에 맞춰 신랑과 조정해 나가는 부분인데 파혼하려고 하는구나 싶다.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본 새롬은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아, 얼굴 보면 풀리겠구나.
“신랑님, 오늘 다 결정하는 건 무리라서요. 예식 날짜와 홀, 보증 인원, 원하신다면 스튜디오, 드레스샵, 메이크업 샵까지 확인하셔야 해서 신부님과 다시 방문 예약 부탁드릴게요.”
“날짜는 9월 중순의 토요일, 홀은 서운 호텔 크리스탈관, 나머지는 샘플 보여주시면 빠르게 정하겠습니다.”
“……서운 호텔 이요?”
서운 호텔 그 안에서도 크리스탈관이라 함은, 국내 재벌가들과 탑 연예인들이 결혼하는 홀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홀인데, 거기에서 하겠다니 새롬의 눈빛이 달라졌다.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으니 수트, 시계, 구두에서 돈 냄새가 폴폴 난다.
“최대한 화려한 쪽으로, 추가할 수 있는 옵션은 다 추가해도 괜찮습니다. 여기 VIP 전용 웨딩플래너가 별도로 있다고 하는데, 그쪽과 상담하고 싶습니다.”
옵션까지 최대로 한다니 그냥저냥 한 부자가 아닌 것 같다. 홀 견적만 최소 1억, 플라워 옵션 최대가 7천, 칵테일 및 부대비용 추가 2천 까지.
기본으로만 잡아도 억 단위가 훌쩍 넘어가는데, 대형 계약일 것으로 평소보다 큰 수수료가 떨어질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전자두뇌로 계산을 마친 새롬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제대로 찾아오셨네요. 그게 바로 저예요 신랑님.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편안하게 퍼스널한 공간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 음료는 어떤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커피나 차, 주스 뭐든 말씀하세요!”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변한 새롬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다. 보통은 신부의 결정이 큰 결혼식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계약서 작성까지 스피드하게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이게 얼마짜리야. 이 녀석 큰 놈이다!’
***
넓고 분리된 응접실로 다시 들어왔다. 이곳은 싱싱하게 관리된 생화 다발로 장식되어 있다. 언제든 이곳만큼은 완벽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VIP 전용 상담실이다.
새롬의 얼굴은 아까 칙칙했던 얼굴빛과는 다르게 생기가 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크흠, 목소리까지 확인한 뒤 세상 친절한 목소리와 함께 명함을 내민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 상담을 맡은 VIP 전문 플래너 도새롬 팀장입니다. ”
금박으로 꾸며져 빛나는 명함을 받은 남자는 피식 웃었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고 턱을 살짝 들어 눈앞의 새롬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는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활짝 웃으며 그 시선을 받는 새롬은 능글맞게 말했다.
“제가 아까는 춘곤증에 몸이 피곤했는데, 이렇게 멋진 신랑님이 오시니 갑자기 힘이 솟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예식 날짜 먼저 확인해 볼게요.”
“네, 갑자기 다른 직원과 상담하는 것 같군요.”
“하하, 제가 반전 매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에게 예식 날짜를 확인한 새롬은 자료 책자를 무더기로 들고 와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보통은 신부님들의 취향대로 홀, 스튜디오, 드레스 컨셉을 보여드리고 추천해 드립니다.”
“…….”
“신랑님께 신부님과 상의하실 수 있도록 몇 곳 추려서 자료 전달해 드릴 테니, 같이 확인하시고 편안히 연락해 주세요. 홀은 정해졌으니, 스튜디오부터 정리하고 후보지를 드릴게요.”
“제가 좀 바빠서 오늘 스케줄까지 확정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신부님과 상의해 보시는 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 계약까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롬은 또 다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질 것 같지만 에라 모르겠다, 계약 하자고 했으니 그냥 진행해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신랑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윤세훈입니다.”
그렇게 계약은 하나씩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신부의 마음에 쏙 들길 바라며 당일에 전체 계약이 완료되었다. 그런데 역시나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했던가, 한 달 뒤 윤세훈의 연락을 받았다.
「결혼식을 미뤄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시간 괜찮겠습니까?」
문자를 확인한 새롬은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이 새끼 파혼할 줄 알았다고.